정부가 추진해 온 금융 개혁·금융규제 완화가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 때문이다.
추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둘러싸고 논란이 이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추진 여부는 점점 불투명해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까지 나서서 조속한 처리를 독려했지만 경제학계와 시민단체, 야당은 물론 여당 내에서도 반대 움직임이 일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10월부터 은행법, 금융지주회사법, 산업은행법, 자통법 등 금융관련 법률 개정안을 정기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하지만 금융산업의 발전을 위한 ‘바이블’로 여겨졌던 미국계 거대 투자은행(IB)들이 줄줄이 추풍낙엽 신세로 전락한 마당에 금융감독 재정비, 위험 관리 능력 제고를 통해 내실부터 갖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벤치마킹 대상이 망했다” =월스트리트의 맹주였던 미국계 대형 투자은행들은 금융공학을 이용한 파생상품과 인수·합병(M&A)을 통해 세계 자본시장을 주름잡아 왔다. 우리 정부는 금융산업을 키우기 위한 전략으로 해외시장 개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IB를 벤치마킹해 왔다.
한국판 골드만삭스나 메릴린치의 육성을 목표로 한 자본시장통합법이 대표적이다. 이 법안은 금융권역 간 장벽을 허물고 다양한 금융상품을 허용해 미국과 같은 대형 투자은행이 탄생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촉발된 금융 위기로 리먼브러더스와 메릴린치는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한국형 성장모델 모색할 때” =경제 전문가들은 이제 미국식 투자은행 모델 대신 한국형 성장 모델을 찾아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미국 금융 시스템의 문제점을 교훈 삼아 건전성 규제와 감독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문하기도 한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을 모델로 자본시장통합법을 도입했는데 난감한 상황이 됐다”며 “미국 시장의 변화를 반영해 건전성·규제 강화는 물론 자통법도 손질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리먼브러더스 인수를 추진했던 산업은행마저도 ‘한국형 투자은행’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윤만호 산업은행 경영전략본부장은 21일 “리먼브러더스는 민영화를 앞두고 투자은행으로 변모하려는 한국 산업은행의 모델이 아니다”며 “증권계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와 달리 기업고객 대상 예금 기반을 갖춘 은행계 투자은행이 산은의 목표이자 한국형 투자은행의 모델”이라고 강조했다.
◆“규제 완화 늦추고 감독체제 정비해야”=미 금융당국마저도 서브프라임 사태와 맞물려 잇따라 불거진 파생상품의 위험성에 혀를 내두르고 있다. 민간자율에 맡겼던 미국의 금융감독 체계에 대한 반성 요구는 미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나오고 있다.
이필상 고려대 교수는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규제 완화에 공감하지만 위험 관리 능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규제를 지나치게 많이 풀면 금융회사가 부실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삼성경제연구소 권순우 박사는 “미국식 자본시장 시스템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감독이 제대로 안 된 것이 문제”라며 “시장이 너무 빠르게 발전하는 것을 감독체계가 못 따라간 것”이라고 진단했다.
◆공기업 민영화도 난관 봉착=정부가 추진 중인 공기업 민영화도 미국발 신용경색 파장으로 어려움을 겪을 전망이다.
올해 하반기부터 지분 매각이 예정된 우리금융지주 매각부터 여의치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기업은행, 한국전력기술, 지역난방공사의 정부지분 매각도 계획대로 추진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산업은행과 예금보험공사, 자산관리공사가 보유한 현대건설과 하이닉스 등 10여개 공적자금 투입 기업의 매각도 지연될 가능성이 커졌다. 헐값 매각 논란을 잠재우고 공적자금 회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매각 시기를 조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홍진석 기자 gija@segye.com